인공 원자에서 울리는 양자 진동 — 공명 활성화(Resonant Activation)가 보여준 초전도 회로의 비밀
서론: 1984년 실험으로 본 공명 활성화의 의미
1980년대 초,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은 얼마나 큰 세계까지 유효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입자에서는 당연하게 보이던 양자 현상이, 수많은 전자가 얽힌 거시적 전기 회로에서도 작동할 수 있을까요? 이 의문에 실험적으로 접근한 것이 바로 1984년 발표된 논문, “공명 활성화(Resonant Activation) from the Zero-Voltage State of a Current-Biased Josephson Junction”입니다.
이 연구는 2025년 노벨 물리학상으로 이어진 일련의 성과 중 첫 단추에 해당하며, 전기 회로에서 거시적 양자 터널링(Macroscopic Quantum Tunnelling, MQT)이 실제로 존재함을 보여준 초기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존 클라크(John Clarke), 미셸 드보레(Michel H. Devoret), 존 마르티니스(John M. Martinis) 세 과학자는 미국 버클리대 실험실에서 조셉슨 접합(Josephson junction)을 이용해 이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조셉슨 접합은 초전도체 두 층 사이에 얇은 절연막을 끼운 구조로, 고전적인 전자기 이론으로는 전류가 통과할 수 없지만, 양자역학적으로는 전류가 ‘터널링’을 통해 절연막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이 실험은 그러한 터널링 현상이 실제 회로 수준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처음으로 관찰했으며, 이후 1985년 후속 연구에서 에너지 준위의 양자화(energy quantisation)까지 확인함으로써 현대 양자회로 연구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1. 조셉슨 접합과 ‘경사진 세탁판’ — 양자 터널링의 실험 무대
조셉슨 접합은 외부 전류가 흘러도 일정 구간에서 전압이 0인 제로 전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접합의 위상(phase)을 하나의 입자로 간주하면, 그것은 경사진 세탁판(washboard) 형태의 퍼텐셜 우물에 갇힌 입자처럼 행동합니다. 바이어스 전류가 커질수록 세탁판의 기울기가 증가하고, 우물 사이 장벽의 높이는 낮아집니다. 고전적으로는 장벽을 넘을 수 없지만, 양자역학적으로는 확률적으로 벽을 관통(터널링)하여 탈출할 수 있습니다.
연구진은 조셉슨 접합을 밀리켈빈(mK) 수준으로 냉각한 뒤, 바이어스 전류를 천천히 증가시키며 스위칭(switching) 이벤트—제로 전압 상태에서 유한 전압 상태로 전이하는 순간—를 반복 측정했습니다. 이때 스위칭이 일어나는 전류의 분포(히스토그램)를 분석하면, 장벽의 높이·품질인자(Q)·임계전류(Ic) 등의 정보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측정 결과는 단순한 열 활성화(thermal activation) 모델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낮은 온도에서 스위칭 분포 폭이 더 이상 좁아지지 않거나(포화), 특정 주파수의 마이크로파 구동에 대해 탈출률이 두드러지게 증가하는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회로가 양자화된 진동 모드를 가지고 있으며, 외부 자극과 공명할 때 터널링 확률이 증가한다는 해석과 일치했습니다. 다시 말해, 조셉슨 접합은 단순한 전기 소자가 아니라 거시적 양자 진동자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 현상은 이후 여러 조건에서 재현되며, 양자역학이 전자회로 규모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함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1984년 논문은 제로 전압 상태에서의 공명적(주파수 선택적) 활성화를 정밀히 관측함으로써, “열 잡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탈출 메커니즘”을 제시했습니다. 이로써 MQT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했으며, 1985년 연구에서 보고된 에너지 준위 양자화 관측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2. 공명 활성화(Resonant Activation) — 회로 속에서 들려온 양자의 진동
이 논문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제목에 등장하는 공명 활성화(Resonant Activation)입니다. 연구진은 전류 바이어스된 조셉슨 접합(underdamped JJ)을 밀리켈빈 영역으로 냉각하고, 약한 마이크로파 자극을 가하며 제로 전압 상태에서 유한 전압 상태로의 탈출 확률을 통계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특정 주파수 대역에서 탈출률이 급격히 증가하는 공명 피크가 나타났으며, 이는 접합의 고유 진동수인 플라즈마 주파수(ωₚ)와 일치했습니다.
즉, 위상 입자(phase particle)가 퍼텐셜 우물 내부에서 진동하다가, 외부 구동의 주파수와 동조할 때 터널링 확률이 급격히 증가한 것입니다. 공명 피크의 위치·폭·세기는 회로의 정전용량(C), 임계전류(Ic), 품질인자(Q), 감쇠 저항(R)과 정량적으로 연관되며, 공명 활성화는 단순한 현상 관찰을 넘어 정밀 계측 도구로 기능했습니다.
1984년 논문은 에너지 준위 분리 자체를 직접 관측한 것은 아니지만, 양자 진동 모드의 존재를 시사하는 강력한 정황을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공명적 탈출률 증가는 회로가 하나의 양자적 진동자처럼 동작함을 의미하며, 그 정량적 분석은 후속 연구의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연구진은 온도 의존성 실험을 통해 열 활성화 모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저온 포화 및 공명 강화 현상을 규명했습니다. 이어서 주파수 스캔과 파워 스윕을 통해 탈출률의 비선형 응답을 정리하고, 플라즈마 주파수 근처에서의 동조 효과(synchronisation)를 실험적으로 구조화했습니다. 품질인자(Q)가 높을수록 공명 효과는 예리하고 강하게 나타났으며, 감쇠가 큰 경우에는 피크가 넓고 완만해졌습니다. 이런 경향은 후속 실험들에서도 반복 검증되었습니다.
결국 1984년의 공명 활성화 실험은 양자화 직접 관측 직전의 결정적 전단계로서, 거시적 전자회로가 양자 동역학을 따르는 정량적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이 성과는 1985년의 에너지 준위 양자화 직접 관측과 결합되어 오늘날 초전도 큐비트 물리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3. 거시적 양자계의 서막 — 인공 원자와 양자공학의 탄생
이 연구의 의의는 단순히 양자 터널링을 입증한 데 그치지 않습니다. 회로 전체의 집단 변수(위상·전하)가 하나의 양자 자유도로 작동함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전자가 만들어낸 거시적 전자회로가 단일 양자체계로서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이후 같은 연구진은 1985년 논문 “Energy-Level Quantization in the Zero-Voltage State of a Current-Biased Josephson Junction”에서 조셉슨 접합의 포텐셜 우물 내 이산적인 에너지 준위를 마이크로파 분광(spectroscopy)으로 추적했습니다. 바이어스 전류 변화에 따라 이동하는 공명 흡수 피크를 측정하여, 준위 간 간격이 이론적 예측과 일치함을 보였고, 이를 통해 에너지 준위 양자화를 직접적으로 검증했습니다. 이로써 1984년 공명 활성화 실험이 ‘정황 증거’를 제공했다면, 1985년 연구는 그 증거를 분광학적으로 확증한 실험적 완성 단계였습니다.
이 두 연구는 결합되어 초전도 큐비트(superconducting qubit) 기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조셉슨 퍼텐셜의 비조화성(anharmonicity) 덕분에 다준위 진동자 중 두 개의 준위만 선택적으로 분리하여 사실상 두준위계(큐비트)로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스위칭 측정은 초기 위상 큐비트(phase qubit)의 상태 판별(readout)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플럭스(flux)·전하(charge) 큐비트와 잡음 저항성을 강화한 트랜스몬(transmon)으로 발전하면서, 공명 구동·분광·탈출 분석은 주파수 설정, 구동 보정, 판독 오류 진단의 필수 도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연구 흐름을 기반으로 2019년 구글 팀은 초전도 회로로 양자 우위(quantum supremacy)를 보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공명 활성화 기법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계측 및 검증 레시피로 활용됩니다. (i) 스위칭 전류 히스토그램과 탈출률의 주파수 의존성으로 회로 파라미터를 역추정하고, (ii) 저온 포화 현상을 통해 열활성→양자 터널링 전이점을 규명하며, (iii) 파워·선폭 분석을 통해 결맞음(coherence) 시간과 잡음 스펙트럼을 진단합니다. 양자 증폭기(JPA)나 SQUID 기반 초정밀 센서 개발에서도 이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결국 1984–85년 연작은 거시적 전자회로의 양자 동역학을 실험–분광–계측의 완결된 체계로 연결한 연구로, “회로를 양자화하고, 공명으로 읽고, 스위칭으로 판독한다”는 철학은 오늘날 양자컴퓨팅 하드웨어의 표준 언어가 되었습니다.
결론: 공명 활성화가 남긴 레거시
1984년 버클리 실험실에서의 공명 활성화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거시적 전자회로에서도 양자역학이 작동함을 입증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스위칭 전류 히스토그램과 마이크로파 주파수 스캔을 결합한 이 계측법은 이후 전 세계 연구실에서 재현되며, 조셉슨 접합을 ‘인공 원자’로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습니다.
1984년의 결과는 에너지 준위 양자화를 직접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열 잡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공명적 탈출률 증가를 정량화하여 거시적 양자 터널링의 우세 조건을 규정했습니다. 이 실험이 1985년의 에너지 준위 양자화 직접 관측으로 이어지며, “회로에서의 양자 터널링과 양자화”라는 연구 서사를 완성했습니다.
그 방법론적 유산도 크습니다. 공명 피크의 위치, 선폭, 파워 의존성을 활용한 회로 파라미터 추정과 저온 포화 분석은 오늘날 양자측정의 표준 절차가 되었으며, 오류율 분석·SNR 향상·양자 상태 판독 정확도 개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공명 활성화 실험은 단순한 과거의 연구가 아니라, 양자공학의 언어와 철학을 정립한 살아있는 레거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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